상생과 공생

'공생발전'.  올해 8월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이대통령이 사용하면서 여러 언론에 빈번히 등장하게 된 표현이다. 한편, 얼마전 적지않은 돈을 기부한 안철수 서울대학교 융합대학원장은 자신의 기부가 '공동체의 상생을 위한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실천'이라고 말한 바가 있다.

요즘 시중 여론의 한복판에 있는 두 사람이  '공생'과  '상생'이라는 다른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두가지 표현을 접하는 일반 대중들로서는 이 들이 같은 뜻을 가진 다른 용어인지 아니면 표현이 다르듯이 그 뜻도 다른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이 대통령은  '지구 환경 보전과 경제 번영, 성장과 삶의 질 향상, 경제발전과 사회통합, 국가의 발전과 개인의 발전이 함께 가는 새로운 발전'을 '공생발전'의 개념으로 제시하면서 보다 세부적으로는 '기후 변화에도 대응하고 우리 모두의 생존 기반도 다지는 발전, 격차를 확대하는 발전이 아니라 격차를 줄이는 발전, 고용 없는 성장이 아니라 일자리가 늘어나는 성장, 서로가 서로를 보살피는 따뜻한 사회, 길어진 생애 주기 전체에 걸쳐 자신의 행복을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는 사회'가 곧 "공생 발전(Ecosystemic development)" 이라고 제시하고 있.

한편 상생은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며 이익되게 사는 것' 정도의 뜻으로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것으로 우리에게 비교적 친숙한 용어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연원은 아마도 오행의 상생원리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오행상생의 원리는 수(水)는 목(木)을, 목(木)은 화(火)를, 화(火)는 토(土)를, 토(土)는 금(金)을, 금(金)은 수(水)를 생(生)하게 하면서 순환함으로써  생성-성장-소멸의 변화사이클이 영원히 지속된다고 설명한다. 본질은 같되 외형적으로 표출되는 기운의 성격이 약간씩 다를 뿐이라는 뜻도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원대한 뜻을 지닌 상생을 '상생정치'와 같이 정치적인 혹은 '상생경영'과 같이 경제적인 상황에 대입시켜 사용하면서 그 적용범위가 쌍방간에 도움을 주고 받는 관계 정도로 축소된 듯한 감이 없지 않다.   안원장이 사용한 상생의 실천이라는 표현도 많이 가진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덜 가진 사람 더 나아가 사회적 약자나 소외계층에게 자신들이 가진 것을 베풀어 줌으로써 그 베품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는 실천이라는 뜻으로 읽힌다. 


이렇게 보면 이 대통령의 공생이나 안원장의 상생은 '나만의 잘 살기' 보다는 '상대방 혹은 주변과 더불어 잘 살기'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표현만 다를 뿐 그 뜻에 있어서는 거의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즉, 상대를 배려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으나 상대를 나와 분리된 별개의 존재로 고정시켜 놓은 상태에서 나보다 상대적으로 열세적 상황에 처해 있는 상대가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베풀어야 한다는 뜻을 강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나보다 나은 상대에 대한 배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은연 중에 전제하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

그런데, 공생은 상대와 내가 근본적으로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를 나와 똑같이 생각하며 내가 잘 살면 상대도 최소한 내가 사는 정도로는 살 수 있도록 배려하고 도와주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상생과 차별화된다.

사실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우리 인간을 포함한 모든 유기 생명체, 즉 식물과 동물들은 그 탄생과정에서 '세포공생'이라는 공생시스템을 개발함으로써 비로소 존재할 수 있었다. 생명체 발생 초기의 원핵세포 생명체들이 혼자만의 삶을 도모하는 '독생'의 삶을 살다가 서로 더불어 한 몸을 이루되 기능을 분화하는 형태의 '공생'적 삶을 살게 되면서 생명체는 식물과 동물로 혁명적인 진화를 하게 된 것이다. 세포공생은 단순히 식물은 식물끼리 혹은 동물은 동물끼리의 삶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식물과 동물사이까지도 관통하는 삶의 방식이라는 점에서 모든 생명체의 조화로운 존재방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호흡작용을 통해 산소를 받아들이고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만 식물들은 이산화탄소를 받아들여 탄소동화작용을 통해 그들의 삶에 필요한 에너지를 만들면서 산소를 대기중으로 방출한다. 우리가 우리 주변을 형성하는 자연 생태계와도 공생의 삶을 살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무분별하게 자연을 훼손해서는 안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가 평소에 관심을 두지 않아서 그렇지 자연 생태계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공생적 삶의 형태는 사실 아주 다양하다.

꽃의 인공수분에 꿀벌이 도움을 주고 대신에 꽃으로부터 꿀을 얻는 꿀벌처럼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공생관계(mutualism, symbiosis)가 있는가 하면, 파리와 진득이처럼 한 쪽은 이익을 챙기지만 다른 쪽에는 별 영향을 주지 않는 공생(commensalism)도 있고 검은 호두나무가 뿌리에서 화학물질을 분비하여 주변에 다른 식물이 자라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은 공생(amensalism)도 있다. 이 외에도 서로간에 해도 이익도 주지 않는 공생관계(neutralism)도 있고 경쟁적 공생(competition), 스라소니와 산토끼의 관계와 같은 포식자-피식자(predation) 공생, 기생적 공생( parasitism) 관계도 있다.

흔히들 '상생경영' 혹은 '상생정치' 등의 표현을 사용할 때 그 배경에는 '승자독식' 혹은 '강자독식'을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깔려있다. 그런데 자연생태계에서의 치열한 경쟁적 공생 환경은 진화의 원동력을 창출한다. 즉, 경쟁과정에서의 생존을 도모하기 위하여 자연생태계는 '종의 다양화'라는 길을 찾아낸 것이다. 실제로 봄이면 모든 식물이 일제히 꽃을 피우지만 자세히 보면 어떤 식물은 꽃보다 잎을 먼저 틔우기도 하고 어떤 것은 꽃과 잎이 동시에 또 어떤 것은 꽃이 먼저 잎이 나중에 피기도 하는 등의 시기상의 차이를 두고 있다. 심지어 대추나무는 다른 식물의 꽃이 다 시든 뒤에야 비로소 잎과 꽃을 피운다고 한다.

이런 저런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우리는 본질적으로 그리고 태생적으로 공생적 존재들이다. 이것은 우리를 둘러싼 환경에게도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진리이다. 그런데 '공생발전'과 같은 표현이 다소 뜬금없고 생소하게 다가오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우리 존재의 본질적 요소를 잊고 살고 있었다는 걸 의미한다. 따라서 점점 황폐해 지고 있는 지구촌을 보다 행복한 삶의 터전으로 가꾸어 가기 위해서는 지금부터라도 우리가 본래부터 공생적 존재임을 자각하고 주변 인연들과 더불어 조화롭고 평화롭게 공생적 삶을 살도록 각별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